정상인은 항상 시각(視覺)의 예고를 받으며 살아간다. 길을 걸을 때,그 백 걸음 앞의 길이 그대로 보인다면,그가 발을 옮길 세계는 이미 예고된 것이라 할 수 있다.그때 예고된 공간을 예고된 자기 자신의 존재라고 착각할 수 있는 능력을,인간은 가지고있다.바로 지금 주어진 확실한 세계상과 더불어 몇 초 후,혹은 몇분 후에 자신이 거기에 존재할 것이라는 확실함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.공간의 연속을 자신의 존재의 연속에 직접적으로 치환할 수 있는 능력,이로써 세계와 인간은 도리어 예고에 의해 침식당한다.지금 이 순간이 예고에 의해 부림을 받는 것이다.
그러나 맹인의 세계는 바로 지금의 손끝에만 있다.세계는 결코 예고되지 않는다.손끝으로 만지는 순간,세계는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.그 한순간만 홀연히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이다.저 먼 곳에 있는 산이란,맹인에게는 끝내 존재하지 않는다.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거기에 가서 실제로 내디딘 첫걸음일 뿐이다.그로써 존재하게 된산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그 자신도 또한 그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.
미래는 결코 침식당하지 않는다.한순간 한순간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는 절대적인 것이다.
엄격한 긴장 속에 한순간마다 새로움을 얻는 세계와 인간의 투철한 관계.그 경악.그 행복.
달,p59-60, 히라노 게이치로